해운대구유적3

해운대구유적3 소개

안녕하세요.
해운대구 룸싸롱입니다.

해운대구유적3에서는 구석기유적, 강근호선생 추모비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운대구유적3

구석기유적

해운대구유적3 구석기유적

시대 : 구석기 시대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59 / 좌동 933 / 중동 510-1 일원

부산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청사포와 해운대신시가지의 좌동 및 중동유적은 부산의 역사를
지금까지의 신석기 시대에서 구석기 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또한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어 이 시대의 한·일 문화교류와 문화전파 경로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중동·좌동 유적

1992년 12월부터 1993년 4월까지 약 5개월간 조사된 이 유적은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계획에 따라
부산시립박물관의 예비조사를 거쳐 좌동과 중동 2개 지점에서 확인 발굴되었다.
직선거리로 약 300m를 이웃한 이 유적들은 해발 40~50m높이의 구릉에 펼쳐져 있고, 이곳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1만5천년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후기 구석기 유물들이 약 300여점 발굴되었다.이곳에서 출토된 특징적 석기로는 좌동의 경우 긁개와 홈날 그리고 석재로 사용된 몸돌들이,
그리고 중동의 경우는 후기구석기 가운데서도 말기 양상으로 볼 수 있는 돌날몸돌, 돌날, 소형의
찌르개가 있다.

청사포 유적

1990년도 부산시립박물관의 지표조사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된 구석기 유적이다.
청사포 마을 뒤편 해안가 구릉사면에 입지하며, 북서쪽은 밭과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고,
남동쪽은 동해남부선 철도와 산책로가 위치해 있다. 2021년 최초로 일부 필지를 발굴하여 좀돌날,
좀돌날몸돌, 돌날, 긁개 등 후기 구석기 시대 유물을 다량 수습했다. 해당 유적은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하면서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우리나라 구석기 연구에 중요한 후기 구석기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근호선생 추모비

강근호선생 추모비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 산1번지(대천공원 입구)

강근호의사(1898-1960, ’90애국장)

애국지사 강근호(姜槿虎 : 異名 姜華麟)지사는 함남 정평 출신으로 1916 학생소요사건으로
일경에 수배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직후 무장독립군의 산실(産室)인
신흥(新興)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6월 이장령 참모장과 함께 북로군정서에 부임하여
사관연성소 교관 및 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역(戰役)에서는 대한군정서 제1중대장으로 최전선에서 중대원을 지휘하여
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 후 1921년 5월 시베리아 흑하사변,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 교관, 1926년부터 민족적 사회주의
독립운동 등으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맞이하였다.1947년에 귀국한 선생은 1949년 2월 52세의 나이로 陸士(8기특별4차)에 입교하여 장교(군번 13193)가
되어 建軍과 6·25를 거쳐 1956년 5월 103사단 118연대장(중령)에서 전역하였다.
1960년 2월 영도 영선동에서 63세로 作故한 선생의 유해(遺骸)는 1964년 장산으로 모셔왔다가
1990년 12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여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제955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제103호)이
추서되었으며, 2000년 4월 육군 53사단 장병일동은 선생의 유택지(幽宅地)에 추모비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름없이 사라졌던 선생의 애국혼은 2002년 전기(傳記)『만주벌의 이름없는 전사(戰士)들』이
출판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추모비는 2003년 9월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었으며, 평생을
항일독립운동과 진충보국(盡忠保國)에 받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5년 4월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출처 해운대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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